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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인의 행간에서 대구를 읽다

더 높이보다, 더 단단히

calendar_today2026-09-03 visibility28

바라던 자리에 올랐는데도, 어떤 이는 밤마다 잠을 설친다. 합격이나 승진,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성과를 손에 쥐고도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허전하다. 한 계단을 오르면 곧바로 다음 계단이 눈에 밟히고, 잠들기 전 들여다본 페이스북 속 누군가의 소식이 조바심을 더 부추긴다. 겉으로는 잘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자꾸 흔들리는 사람이, 우리 곁에 생각보다 많다. 어쩌면 많이 이룬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단단한 사람인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얼마 전 나는 짐 머피(Jim Murphy)의 『내면 근력(Inner Excellence)』이라는 책을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2009년 조용히 나왔다가 정상급 선수들의 입소문을 타고 되살아나 세계적 화제가 된 책이다. 저자는 촉망받던 야구선수였지만, 성과에 대한 두려움과 압박을 이기지 못해 일찍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리고 바로 그 좌절이 그를 ‘마음의 힘’을 파고드는 멘탈 코치의 길로 이끌었다. 무너지는 마음을 몸소 통과한 사람이라서인지 그의 말에는 현장의 무게가 실려 있다. 그가 책에서 던지는 물음은 뜻밖에 단순하다.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상태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그는 성공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더 많은 소유와 더 높은 지위, 남과의 비교에서 앞서는 외적 성공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내적 성공이다. 앞의 성공은 아무리 채워도 갈증이 가시지 않아 끝없이 다음을 좇게 만든다. 반면, 뒤의 성공은 흔들리는 순간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 충만함에서 온다. 그러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는가’이다.

다행인 것은, 그 내적인 힘이 타고나는 기질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머피는 이를 ‘마음의 근육’에 빗댄다. 몸의 근육이 적당한 부하와 회복을 반복하며 자라듯, 마음의 근력도 불안과 비교와 실패의 두려움이라는 부하를 피하지 않고 다룰수록 깊어진다. 강철 같은 멘탈을 타고난 사람만의 특권이 아니라, 누구든 오늘부터 조금씩 길러갈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다. 코칭과학을 연구한 그는 이 훈련을 막연한 정신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으로 풀어낸다.

그 방법의 핵심은 두 가지로 모인다. 먼저, 실패를 결과가 아니라 데이터로 보는 일이다. 넘어짐을 ‘나는 부족하다’는 증거로 삼는 대신, ‘다음엔 무엇을 달리 해볼까’를 알려주는 정보로 읽는 것이다. 다음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붙들지 않는 일이다. 남의 평가와 결과와 순위는 내 손 밖에 있으니, 오직 내가 바꿀 수 있는 나의 노력과 태도와 지금 이 순간에 힘을 모으는 것이다. 두려움조차 없앨 대상이 아니라, 다룰 대상이다. 머피에게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보다 소중한 것을 선택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훈련의 바닥에는 ‘알아차림’이 있다. 지금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조차 모른 채 감정에 휩쓸리는 대신, ‘아, 지금 나는 불안하구나’ 하고 가만히 이름을 붙여 보는 일이다. 머피의 말처럼, 두려움에 이름을 붙이고 자극과 반응 사이에 한 박자의 틈을 두는 순간, 흔들림을 다스릴 여백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이곳의 우리는 세대를 가릴 것 없이 오래도록 ‘어디에 가야, 무엇이 되어야 인정받는다’는 외적 잣대에 시달려 왔다. 오래 가라앉은 지역 경기 속에 문을 닫는 가게가 늘고, 일자리를 잃거나 첫발조차 떼지 못한 이들의 한숨이 깊은 요즘은 더욱 그렇다. 이런 때일수록 ‘얼마나 이뤘느냐’는 잣대는 사람을 더 초라하게 만든다.

그러나 한 사람의 무게를 가르는 것은 통장의 숫자나 명함의 크기가 아니라, 흔들리는 순간에도 잃지 않는 마음의 중심이다. 무너진 자리를 먼저 알아보고 손 내미는 이웃이 있어, 우리는 기어이 다시 일어선다. 화려한 이력 없이도 제자리에서 하루를 묵묵히 감당하는 사람, 남과 비교하는 대신 어제의 자신과 견주는 사람들이야말로 눈에 띄지 않게 가장 단단한 근력을 기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안과 비교와 실패의 고통을 말끔히 없애는 일이 아니다. 그것들을 안고도 흔들리지 않게, 함께 살아내는 힘이다. 나는 더 높은 곳에 오르는 일보다, 어디에 있든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삶이 먼저라고 믿는다. 무엇을 이룰 것인가는 언젠가 답이 나오지만,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오늘 지금부터 우리가 짓는 것이다. 오늘 무너지지 않고 제 중심을 지켜 낸 하루, 그 하루가 쌓여 한 사람의 단단한 삶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