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를 다시 읽는 일
책을 읽다 보면 뜻밖에 대구가 끼어들 때가 있다. 밑줄 그은 문장 하나가 오래된 골목을 떠올리게 하고, 낯선 이야기 하나가 어제 읽은 지역 기사와 겹쳐진다. 책은 우리를 먼 세계로 데려가는 듯하지만, 결국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독서는 도피가 아니라, 귀환에 가깝다.
대구도 다시 읽을 때가 되었다. 우리는 이 도시를 충분히 안다고 생각한다. 덥고, 무뚝뚝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교육열이 높고, 쉽게 변하지 않는 도시. 누군가는 보수의 심장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청년이 떠나는 도시라 말한다. 맞는 말도 있고, 조금 억울한 말도 있다. 사람도 한마디로 설명하면 서운한데, 하물며 도시는 오죽하겠는가.
대구는 위기 앞에서 자주 스스로의 저력을 증명해온 도시다.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로 나라의 빚을 시민의 힘으로 갚고자 했던 곳이며, 현진건의 문장과 이상화의 시가 여전히 도시의 골목에 숨쉬는 곳이다. 우리 모두에게 두려웠던 코로나19 사태의 긴 터널도 의료진과 시민, 자원봉사자와 이웃들이 함께 견디며 지나왔다. 대구의 힘은 요란한 구호보다 늘 조용히 제 몫을 해내는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그런 사람들을 여러 강연장과 지역의 자리에서 자주 만났다. 강연이 끝난 뒤 의자를 정리하는 사람, 처음 온 이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사람,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 누군가의 작은 시작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이다. 전체로 보면 잘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알알이 빛나는 개인들의 다정함이 있다. 나는 그 다정함 속에서 지역의 가능성을 보았다.
지역을 이해하는 일에는 통계와 현장, 정책과 감각이 함께 필요하다. 청년 유출은 단순한 인구 이동이 아니다. 이곳에서 자신의 미래를 그리기 어렵다고 느낀 결과다. 지역 대학의 위기는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배우고, 일하고, 머물 수 있는 성장 경로가 지역 안에 충분한지 묻는 경고음이다. 산업 전환 역시 기업의 생존전략에 그치지 않는다. 대구가 다음 세대에게 어떤 일자리와 삶의 방식을 제안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숫자는 현실을 보여주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통계표에는 떠나는 청년의 망설임이 적히지 않고, 남아 버티는 사람의 수고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칼럼은 책 소개나 서평에 머물고자 하지 않는다. 책 한 권, 문장 하나, 개념 하나를 빌려 대구의 오늘을 다시 묻고 싶다.
우리 주변에는 이미 텍스트로 남겨진 수많은 지혜와 유산이 있다. 다만 바쁘다는 이유로, 익숙하다는 이유로, 혹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그 유산을 충분히 꺼내 쓰지 못했을 뿐이다. 경제를 다룬 책은 골목상권의 빈자리를 다시 보게 하고, 교육에 관한 책은 지역 인재의 성장 사다리를 묻게 한다. 공동체를 말하는 책은 느슨해진 이웃과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고, 도시를 다룬 책은 대구의 길과 시장, 학교와 일터를 새롭게 걷게 한다.
이 일을 시작하려는 마음은 거창하지 않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간절하다. 다정함은 문제를 덮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더 정확히 보고, 쉽게 단정하지 않고, 누군가의 사정을 한 번 더 헤아리는 태도다. 떠나는 청년을 탓하기 전에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묻는 일,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시작할 자리를 내어주는 일, 지역에 남아 묵묵히 일하는 사람의 시간을 알아보는 일도 다정함의 영역이다.
지역사회는 구호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서로가 가진 지식과 재화, 가치와 시간, 온기와 재능을 조금씩 공유할 때 살아난다. 이런 작은 교환과 신뢰가 쌓이면 진심이 담긴 사회적 자본이 된다. 돈으로 환산하기 어렵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가장 먼저 힘을 발휘하는 자산이다. 물론 다정함만으로 지역의 모든 문제가 풀리지는 않는다. 산업에는 전략이 필요하고, 교육에는 구조가 필요하며, 인재에게는 성장할 생태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전략과 구조도 결국 사람을 향하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지역의 경쟁력은 차가운 숫자 위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서로를 알아보고 연결하려는 마음 위에서 더 단단해진다.
앞으로 이 지면에서 책의 행간을 따라 대구의 행간을 읽어보려 한다. 청년과 인재, 산업과 교육, 공동체와 도시의 품격을 이야기할 것이다. 책장을 덮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대구를 다시 읽는 일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시 읽는 일이다. 그 읽기가 조금 더 정확하고, 따뜻하고, 다정한 지역사회로 이어지기를 바란다.